
프랭클린은 오늘날 미국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필자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존경한다. 그래서 미국 여행 중 그의 묘지를 직접 찾아가고 그와 관련된 박물관도 빠짐없이 방문했다. 고액권에 그가 나와서가 아니다. 프랭클린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이다.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미국의 최초 종합대학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를 만들었다. 그는 교육가이자 혁명가였다.
미국 도서관과 대학교
프랭클린은 도서관 매니아였다. 그의 자서전엔 당시 고가의 책을 공유할 수 있는 도서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하게 나온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부유한 기부자들이 도서관 설립에 아낌없이 후원하는 전통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록펠러 재단인데 록펠러는 전 재산을 기부해 수많은 도서관을 건립하는 데 사용했다. 미국에서 도서관은 단순한 책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 교육과 평생 학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한국인, 서재필
흥미롭게도 프랭클린이 활동했던 필라델피아에는 한국인의 발자취도 남아 있다. 바로 서재필(필립 제이슨. Philip Jaisohn)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도 혁명가였다. 조선의 개화운동에 앞장섰고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혁명이 실패하면서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더욱 가혹한 것은 그의 가족들이 연좌죄로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홀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고난과 이상, 혁명 정신의 산 증거이다. 프랭클린이 지녔던 계몽과 실용 정신은 아마도 그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지식과 개혁을 추구한 공통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서재필의 교육과 계몽 운동
미국에서 서재필은 의사이자 언론인, 교육가, 독립운동가로 폭넓게 활동했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해 시민 계몽과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노력은 우리나라 근대적 시민사회의 초석이 되었다. 독립협회 관계자들은 근대적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배재학교가 있고 출신 학생으로는 이승만이 있다. 이들은 모두 프랭클린처럼 지식과 교육이 국가 발전의 핵심임을 믿었다. 총과 칼 대신 펜과 학교로 민중을 깨우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